06 설화와 민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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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당봉의 금샘
  • 고당봉의 금샘

    금빛 물고기 한 마리가 하늘에서 내려와 놀았다는 범어사의 고당봉 금샘에 전하는 이야기다



    시대 : -

    주소 : 부산광역시 금정구 금성동

 

금정산의 동쪽 산기슭에 우리나라 불교 31본산의 하나이며 화엄종 10찰에 속하는 범어사가 있다. 범어사 창건에 대해서는 678년(신라 문무왕18) 의상대사가 화엄 10찰로 창건하였다는 《삼국유사》의 기록이 있다.《범어사창건사적》에 의하면, 당시 범어사의 가람은 별처럼 늘어서고 중료(衆寮) 360 방사(房舍)가 양쪽 계곡에 꽉 찼으며 사원에 딸린 토지가 360결이고 소속된 노비가 100여 호에 이르는 대명찰이라 하였다. 임진왜란 때 송두리째 불타 다시 중창 된 후, 많은 고승들이 배출되면서 사원의 규모가 커졌으며, 구한말과 일제강점기 때는 선찰대본산이 되어 민족적인 사찰로서 우리의 불교를 수호하는데 앞장서면서 민족불교의 발판을 마련하였다.  양산 통도사, 합천 해인사와 더불어 경남 3대 사찰로 이름나 있으며, 지금까지 수많은 사찰 설화를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범어사에는 바위에 관한 세 가지 기이한 이야기(梵魚三奇)가 전한다. 첫째는 원효대사가 좌선한 곳으로 알려져 지금도 신성시 되고 있는 원효암의 석대[元曉石臺]가 있고, 둘째는 암탉과 수탉의 모습을 한 계명암의 자웅석계(雌雄石鷄)가 있으며, 셋째는 고당봉 바위 위의 자리 잡은 금빛 샘을 뜻하는 암상금정(巖上金井)의 이야기가 있다.

  이 중에서 가장 흥미로운 곳이 범어사의 유래가 된 고당봉의 금샘 이야기일 텐데, 《동국여지승람》 동래현조에는 「금정산은 동래현 북쪽 20리에 있는데, 산정에 돌이 있어 높이가 3장(丈) 가량이다. 그 위에 샘이 있어 둘레가 10여척이요 깊이가 7촌 가량으로 물이 늘 차있어 가물어도 마르지 않으며 색이 황금과 같다. 세상에 전하기를 한 마리 금빛 고기가 오색구름을 타고 하늘에서 내려와 그 샘에서 놀았으므로 산 이름을 금정산이라 하고, 그 산 아래에 절을 지어 범어사라고 이름을 붙였다.」고 밝히고 있다. 이러한 전설 때문에 고당봉의 명칭도 많이 와전되면서 인용된 곳에 따라 각기 다른 의미를 갖게 된 것으로 볼 수 있겠다. 1994년 8월에는 ‘금정산표석비건립추진위원회’를 구성하여 이름찾기 고증작업이 추진되었지만 여러 가지 의견이 나왔고, 그 중 고당봉(姑堂峰)과 고당봉(姑幢峰)으로 의견이 크게 갈리었다.(『부산지명총람』제4권, 금정구편 참조) 명산에는 이러저러한 전설이 있기 마련이다. 금샘이 있는 금정산이야말로 어느 산 못지않게 신령스러운 명산이기 때문에 이런 전설이 전해내려 올 수 있는 것이다.

  범어사가 창건된 지 1천3백여 년의 세월이 흐르도록 스님들이 대대로 비밀로 숨겨왔다가 일반인에게 공개된 것은 1991년 5월 ‘부산공동체를 생각하는 모임’ 회원 50여 명이 현장을 답사하면서 그 위치가 일반인들에게 알려지게 되었다 한다. 그 위치에 대해서는 일제강점기 때의 기록에 나타나고 있으나, 정확한 위치를 찾지 못했던 것이다. 바위 위에 우물이 있어 하늘에서 금빛 물고기가 내려와 노닐었다는 것은 풍요와 다산을 기원하는 고대 농경사회의 제천을 올린 장소로 풀 수 있다. 하지만 땅에서 물이 솟아나는 것이 아니라 푸석돌이 많이 섞인 부스러기 바윗돌에 빗물이 고여 있는 것이 신비롭다. 낙동강에서 올라온 안개로 인해 주변의 공기 자체가 수분이 많아지면 낮의 햇빛 열기로 더운 바위가 주위의 수분을 빨아들이는 작용으로 샘물이 찰 수도 있단다. 그래서 민간에서는 자연 에너지를 응축한 생명의 정화수로 여길 수 있나 보다.  옛 문헌이든 전설이든, 금샘은 마르지 않고 황금빛깔이며, 하늘에서 내려온 금빛 물고기가 노는 신령스런 곳이란 설명은 일치한다. 사방이 확 트인 풍광명미한 곳에서 불가사이한 모습으로 지금까지 남아 왔다. 금정산 황금 억새가 석양이 불타는 하늘에 실려 투영될 때는 물빛도 자연히 황금빛깔이 된다. 그냥 자연의 신비라고하기에는 너무 신령한 정기가 가슴 벅차게 느껴진다.

  금샘이 있어 금정산으로 불리고 금샘이 있어 범어사가 세워진 것만으로도 이 샘은 전설이 아닌 사실이지만, 의상대에서 바라본 남해바다를 ‘의상망해(義相望海)’라 하고, 어산교 옆의 오래된 소나무를 ‘어산노송(魚山老松)’라 하며, 대성암 밑을 흐르는 물소리를 ‘대성은수(大聖隱水)’라 하고, 청련암의 밤비 소리를 ‘청련야우(淸蓮夜雨)’라 하며, 계명암의 가을 달을 ‘계명추월(鷄鳴秋月)’이라 하고, 내원암의 저녁종소리를 ‘내원모종(內院暮鐘)’이라 하며, 금강암의 가을 단풍을 ‘금강만풍(金剛晩楓)’이라 하고, 고당봉의 저녁 구름을 ‘고당귀운(古幢歸雲)’이라 한 금정산의 8경(金井山八景)을 못보고 금정산을 안다고 할 수 없다.  이 중에서 어산교에 얽힌 낭백 스님의 일화를 들어보겠다. 조선시대의 이야기다. 사찰에 부여된 부역수가 36종에 이르러서 부과된 부역에만 종사하기에도 바쁜 나날을 보내야 하는 시절이 있었다. 때마침 낭백 스님이란 분이 있어 이러한 당시의 사정을 뼈아프게 생각하며 부역을 면하고 살아야겠다고 결심하였다. 설사 금생에 안 되면 내세에서라도 부역을 면하고 마음껏 공부할 수 있게 하리라, 마음먹고 부처님께 서원을 다하였다. 원력을 짓기 위해 부근 큰 소나무 밑에 샘물을 파서 식수를 제공하거나 밭을 개간하여 과일, 채소 등을 행인에게 나누어도 주고 짚신을 삼아서 보시도 하였다.

  스님이 돌아가실 즈음에, 자신을 따르던 많은 불자 앞에서 3가지 과제를 던져 주었다. ″내가 죽어 다시 환생하여 나라의 고급관리가 되면, 모든 관리가 다 일주문까지 와서 말에서 내리지만, 난 어산교 앞에서 내리겠다″고 한 말도 그 중 하나였다. 그 뒤 스님은 열반에 들었고 제자들도 늙었다. 어느 날, 마침 중앙에서 순상국(巡相國)이란 직함을 띤 높은 벼슬아치가 온다는 전갈을 받았다. 스님들은 어산교까지 나가서 행렬을 지우고 부복하여 기다렸다. 그런데 이 사람은 당시 어산교까지 말을 타고 올라오는 상례를 깨고 어산교 앞에 이르러서는 말에서 내리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낭백 스님의 환생임에 틀림이 없다고 믿었다. 이 사람이 통신사로 떠난 조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