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 설화와 민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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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민락동 보리전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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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리전 마을에는 매품을 팔아서 받은 보리로 난전을 폈던 가난한 시절, 민락동 사람들의 이야기가 전하고 있다



    시대 : 조선

    주소 : 부산광역시 수영구 민락동 1

 

수영구 민락동에 보리전 마을이 있었다. 보리 파는 시장에 얽힌 이야기지만, 그 유래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조선시대 좌수영 산하의 포이진(包伊鎭)이 있었던 곳으로 그 음이 바뀐 것이라는 설이고, 다른 하나는 수영 사람들에게 보리를 팔고 가려고 장터를 벌인데서 생겼다는 설이다. 조선시대 좌수영 산하 백성들이 범법을 저질렀을 때 곤장을 맞으러 좌수영 관아로 들어갔다. 경우에 따라서는 범법자 대신에 대매를 맞는 사람도 있었다. 이들은 맷값으로 받은 열흘치 내지 보름치의 보리 양식을 이곳에 나와서 팔았다. 조선후기 야담에 의하면, 대매한 예가 흔하게 나타난다. 수영에 "보리 양식지고 매 맞으러 간다"는 속담이 전해지고 있는 것도 이런 연유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다.

  성대중의 《청성잡기(靑城雜記)》에 안주 병영에 있었던 슬픈 대매 이야기가 있다.  안주의 한 백성이 매품을 팔아 살았다. 어떤 아전이 병영에서 곤장 7대를 맞아야 할 일이 생겼다. 하는 수 없이 5궤미 돈을 걸고 대신 매 맞을 사람을 구했다. 그 매품팔이가 선뜻 나섰다. 집장사령은 그 자가 번번이 나타나는 것이 얄미워 곤장을 혹독하게 내리쳤다. 곤장이 갑자기 사나워질 것을 예상치 못한 매품팔이는 꾹 참았다. 두 번째 매가 떨어졌다. 도저히 견뎌 낼 재간이 없었다. 얼른 다섯 손가락을 꼽아 보였다. 5꿰미의 돈을 뒤로 바치겠다는 뜻이었다. 집장사령은 못 본 척하고 더욱 심하게 볼기를 내리쳤다. 매품팔이는 생각했다.

  ″이러다가 곤장 7대가 끝나기 전에 내가 죽겠다.″

  재빨리 손가락 다섯 개를 다시 펴 보였다. 뒷돈을 배로 올리겠다는 뜻이다. 그 때부터 매는 아주 헐겁게 떨어졌다. 병영을 나온 매품팔이는 사람들을 보고 뽐냈다.

  ″내가 오늘에야 돈이 좋은 줄 알았네. 돈이 없었으면 오늘 나는 죽었을 게야.″

  기록자 성대중은 ″매품팔이가 돈 10궤미로 죽음을 면할 줄만 알고, 5궤미가 화를 불러온 것은 모른다며 형조의 곤장은 속전 7궤미였고, 대신 받는 돈도 마찬가지였다″며 그를 어리석은 촌사람이라고 했다. 요즘 말로 정보에 약했던 것이다.

  또 다른 이야기도 있다. 대신 매를 맞는 일로 살아가는 자가 있었다. 어느 무더운 여름날, 백 대의 매품을 하루에 두 차례나 팔고, 비틀거리며 자기 집으로 돌아왔다. 그 아내가 남편을 보자 기쁜 듯이 말한다. 백 대의 품을 선셈으로 받아놓았다는 것이다. 사내는 상을 찌푸리며 말한다.

  ″내가 오늘 죽을 똥을 쌌어. 세 번은 못 하겠네.″

  아내는 돈이 아까웠다.

  ″여보! 당신이 잠깐만 고통을 참으면 우리 가족이 여러 날 편히 배를 불릴 수 있잖겠수. 천행으로 굴러온 걸 왜 굳이 마다 하시우?″

  갑자기 술과 고기를 장만하더니 먹인다. 술에 취한 사내는 자기 볼기를 쓰다듬으며 허허 웃고 집을 나선다.  그 남자는 곤장을 맞다가 죽었다. 아내도 이웃의 미움을 사서 구걸도 못할 처지가 되어 길에 쓰러져 죽었다고 전한다. 기록자가 이 이야기를 전하는 건 세상에 경계로 삼기위한 도덕적 측면이 강하다. 상설 점포가 거의 없는 지방의 장시에서는 보부상(褓負商)이 상품유통의 주도적인 역할을 했고, 도시의 시장과 농촌을 연결하는 것도 이들을 매개로 하여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았지만, 그것도 힘이 있어야 가능했고 일반 평민들은 달랐다. 수영구에는 백산 북쪽의 보리전 마을과 백산 남쪽의 널구지 마을이 약300년 전부터 있었다고 한다. 수영강 쪽으로 땅이 뻗어있어 모두 편편하고 넓다는 의미에서 비롯되었다 한다. 보리전을 펼치기에는 좋은 곳이다. 일제강점기에는 보리전 마을을 평민동이라 하였고, 두 마을 백성들이 모여 즐겁게 사는 동네라 하여 ‘민락’이라 했다는 말도 전해지고 있다. 1914년 행정구역개편에 따라 두 마을을 합하여 민락동이라 하였지만, 이곳에서도 매품을 팔아 보리전을 폈던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