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 인물과 자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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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목재왕, 사회사업가로 활동한, 강석진
  • 목재왕, 사회사업가로 활동한, 강석진

    강석진은 직접 부산 전역을 돌아다니면서 선택한 부지가 용당동 일대였다. 당시 한적하고 조그마한 포구에 지나지 않았던 용당동 갯가와 주변 일대에 연차적인 계획에 따라 공장부지를 조성하여 제2의 동명시대를 열게 되었다.



    시대 : -

    주소 : 부산광역시 남구 신선로 294

 

강석진(姜錫鎭, 1905∼1984)은 경상북도 청도군 풍각면에서 아버지 강병우와 어머니 서순득의 3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초등학교를 겨우 마친 뒤 15세가 되던 1920년 가난이 싫어 빈손으로 부산을 찾았다. 일본인 가구점에 들어가 심부름을 하면서 목공 기술을 배워 5년 만에 일류 목공이 됐다. 강석진은 창업자금 400원[현재 4000만 원 상당]으로 1925년 4월 동명목재의 전신인 동명제재소를 부산 동구 좌천동에 세웠다.

 

1945년에 합판 제조 및 제재 공장을 부산진구 범일동 862번지[현재의 범일동 부산교통공단 인근]로 이설, 확장하고, 회사가 신용과 신의도 갖췄다는 평가도 받으면서 번성하자 합판 사업에 뛰어들었다. 1949년에는 동명목재상사로 이름을 바꾸고 제재 사업뿐만 아니라 합판 생산 사업에도 뛰어들었다.

 

하지만 해방 정국의 혼란과 무질서한 사회 정세로 판매 부진이 이어져 위기를 맞았다. 공장의 이전과 시설 설비에 많은 자금을 투입했으나 운영 자금마저 고갈되는 등 1년 정도 어려운 시기가 지나자 합판의 수요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으로 6·25전쟁이 끝나자 국토의 재건 및 전후 복구사업과 함께 재도약의 기회를 맞이하게 된다. 밀려드는 주문을 소화하느라 밤낮없이 제품 생산에 몰두해야만 했다. 한 번의 큰 화재와 큰 폭풍을 겪은 후, 동명목재상사는 다시 공장 확장을 계획했다. 강석진은 직접 부산 전역을 돌아다니면서 선택한 부지가 용당동 일대였다. 당시 한적하고 조그마한 포구에 지나지 않았던 용당동 갯가와 주변 일대에 연차적인 계획에 따라 공장부지를 조성하여 제2의 동명시대를 열게 되었다.

 

1960년에는 남구 용당동에 제1 합판 공장을 착공한 후 열대 원목인 나왕(羅王)을 수입하여 합판을 생산하였다. 1961년에는 국내 최초로 미국에 합판 수출을 시작하여 26만 3000달러어치를 수출한데 이어 1964년에는 4000만 달러어치를 수출했다. 이후 미주 뿐 아니라 유럽과 중동 지역으로도 수출했다. 동명목재는 1963년 범일동 공장의 생산 시설을 용당동 새 공장으로 옮기고 일본과 독일에서 첨단 기계를 들어와 다양한 형태의 무늬와 신상품을 출시하였다. 77개 동명목재 대리점들은 서로 많은 물량을 달라고 아우성치는 시절을 맞이했다.

 

동명목재는 1967년에 제2 공장, 1968년에 가공 합판 공장, 1974년까지 200만㎡의 시설을 확충했다. 시장은 미국은 물론 유럽, 중국까지 넓혀갔다. 1965년 50여억원 매출이, 1978년에 1000억으로 껑충뛰었다. 수출은 1977년에 1억 35만 달러는 단일 품목 국내 최대의 수출실적을 올렸다. 1968년 이후 3년 연속 전국 수출액 1위에 올라 국내 수출 최고상을 수상하면서 ‘수출왕’의 칭호를 얻었다.

 

동명목재는 세계 최대의 합판 회사로 부상하면서 1960∼1970년대에 한국 수출 산업의 선구자 역할을 하게 되었다. 합판은 한국 수출 상품 중에서 1961년 8위에서 1970년에는 2위로, 1975년에는 4위, 1980년에는 8위를 기록했다. 동명의 목재산업은 이처럼 선두 업종에 포함됐다. 한국의 수출을 주도했고 20여년 동안 10대 수출 상품의 자리를 지켜왔다. 동명목재는 합판에 사용하는 독자적인 만능 접착제를 만드는가 하면 합판 제조 과정에서 생겨나는 폐기물과 접착제를 혼합해 고열의 프레스로 찍어서 ‘파티클 보드’라고 불리는 신상품도 개발했다.

목재 산업에 성공을 거두자 1978년부터 동명산업을 시작으로 동명개발, 동명중공업, 동명식품, 동성해운 등의 회사를 설립해 동명그룹을 탄생시켰다. 강석진은 1962년 제4대 부산상공회의소 회장의 잔여 임기를 대행한 것을 시작으로 1967년부터 1976년까지 제6·7·8대 부산상공회의소 회장을 역임하였다. 한편, 1969년부터 1967년까지는 사단법인 부산항부두관리협회 회장을 역임하였고, 1971년부터 1978년까지는 사단법인 부산불교신도회 회장을 역임하며 진해 호국사[1972년], 부산 금련사[1972], 동명불원[1977]을 창건하였다.

 

1964년에는 BBS[Big Brother and Sister] 부산광역시 연맹을 설립하고, 회장으로 취임하여, BBS부산연맹 회관을 건립하고 불우 청소년의 보금자리를 마련해줬다. 그들의 생업 자금과 학자금을 지원하는가 하면 사회로부터 버림받고 소외된 자들의 보호와 재기에 힘을 실어주는데 앞장섰다. 1960년대 말 팔각회를 창립해 반공정신 고취와 호국사상 전파에 열을 올리기도 했다. 그 공로로 1974년 1월 대만 중화학술원에서 명예 철학 박사 학위를 받기도 했다.

 

1977년에는 학교법인 동명문화학원 설립 허가를 받아 초대 이사장에 취임하였다. 동명그룹은 문화·교육·체육 사업에도 힘을 쏟았다. 부산에 고등법원, 고등검찰청 설립 추진운동을 펼쳐 그 뜻을 이뤘다. 부산과 일본 시모노세키 정기 운항선인 부관페리호 취항을 성취시키는데도 일조했다. 1978년 동원공업고등학교(현 동명정보공업고등학교)를 개교하였고, 동원공업전문대학(현 동명대학교)을 설립하였다. 1980년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와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에 의해 반사회적 기업인으로 몰리면서 동명문화학원을 제외한 전 재산을 강제 헌납이란 형식으로 강탈당하였다. 이후 강석진은 4년간 세속일과 담을 쌓고 집과 학교를 오가며 지내다가 1984년 10월 29일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