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문화와 예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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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방문화의 역사, 동래권번
  • 기방문화의 역사, 동래권번

    동래권번은 우리 기방문화의 역사와 민속예술의 전통을 이은 곳으로, 1920년 이후에 일본식 명칭으로 불리게 되었다



    시대 : 현대

    주소 : 부산광역시 동래구 쇠미로151번길 4-24

 

 

각종 음식점과 요리점의 영업이 활발해지면서 관기(官妓)제도가 폐지된 일제강점기 때, 자유로운 몸이 된 동래부 관기 출신들이 1910년 자치적으로 동래기생조합을 만든다. 동래권번의 전신이다. 조합의 기생들은 동기들에게 가무를 가르치고, 자기 자신들이 닦은 가무를 연희자리에서 베풀었다. 1912년에는 동래예기조합(東萊藝妓組合)으로 이름을 바꿔 동래읍 교동에 자리를 잡고 주무대를 동래온천장의 고급 요릿집으로 하였다. 동래온천장으로 진출한 이때, 독특한 기방문화가 발전하기 시작했다. 동래온천의 기방문화는 우리나라의 오랜 기방문화의 역사와 함께 민속예술의 전통과 맥을 이어준 특수한 생활문화의 한 부분을 이뤘다. 교방청의 예기들이 모여 권번이 되었던 것이다. 동래온천에 일본인들이 늘어나면서 일본인을 상대로 하는 일본기생 게이샤도 진출하였다. 게이샤는 일본 요정의 술자리를 전통 현악기인 샤미샌(三味線)을 튕기며, 우리나라 기생과 비슷하게 노래를 부르거나 춤을 추고 시중을 들었다. 온천장에서 게이샤들이 돌아다니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다.조선시대 동래부에 관기를 둔 것은 다른 지방과는 달리 외교상 필요에 의한 것이었다. 일본에서 오는 사신들을 접대하거나 우리 측 사신을 떠나보내며 분위기를 띄우는 분위기 메이커 역할을 했다. 자연 풍류와 춤이 곁들여 졌다.  기록에 의하면 1898년 일본 영사가 조선의 궁내부에 동래온천 임차계약을 요구하는데 이때 일본 기생들을 공동 관리하는 "오끼야권번"이 생기고 게이샤(藝者, 일본식 발음)들의 조직인 권번을 본떠 1910년 "동래기생조합"을 결성하였다. 당시 사무실은 동래세무서 옆 중앙의원 자리였다. 1896년 공사노비철폐제도가 시행되어 관기가 없어진 이후 14년 만이다. 그래서 동래구 명륜동에 영보단이 세워진다. 노비와 기생의 호적을 소멸시킨 은총을 기념하는 비석이다. 1912년 "동래예기조합"으로 명칭을 변경하는데 게이샤가 예자(藝者)를 뜻하므로 조선기생들도 예기(藝妓)로 표현하려는 의도였다고 한다.

 

1920년 이것이 "동래권번"으로 명칭을 바꾼다. 권번은 교방(敎坊)의 일본식 용어다. 일제강점기 초반에 조직된 동래기생조합이 1920년대부터 동래권번으로 바뀐 것이다. 또한 일제강점기의 기생제도를 보면, 기생과 권번과 경찰서와 요리집의 이권이 얽혀 있다. 기생이 놀음에 나가기 위해서는 먼저 권번에 일종의 소개료를 내야하고, 요리집(요정)에도 일부 내야 한다. 또 경찰서는 기생 영업에 대한 세금을 거두었다. 일제가 관기들을 모두 없앤 후, 1908년에 기생단속령과 창기단속령을 내려 경찰 관할 하에 놓은 것도 기생에 관한 통제뿐만이 아니라 경제적 이권을 챙기기 위해서였다. 1929년 동래권번이 총파업을 했다. 몸 파는 창기(娼妓)들이 신체검사를 받으라는 일제당국의 방침에 대한 항의였다. 동래권번은 물산장려운동에도 참여하고, 동래제2보통학교 증축에도 큰돈을 기부했다. 동래 기방의 행수기생 출신으로 기생조합 창설의 주인공이 한동년이다. 아름답고 기품이 넘치고 가무에 일가를 이룰 정도여서 영남지역의 풍류객이나 한량들 사이에는 그녀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목사 김만일(金萬一)의 설득에 감동 받아 용호동 나환자촌을 따라갔다가 고아들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한다.

 

이후 권번생활을 청산하여 전 재산을 고아원에 기부하고 고아를 돌보는 보모가 되었다. 이후 김만일 목사와 결혼하여 서울로 자리를 옮겨 여러 가지 사회사업에 헌신적으로 봉사하다가 여생을 보람 있고 가치 있게 마쳤다. 한동년은 그 후 동래온천의 많은 기생들에게 가장 추앙받고 존경받는 대선배로서 후배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1930년대 남도창으로 명성을 날렸으며 후일 ‘호산장’이란 요정을 경영하기도 했던 이연숙(李蓮淑)도 한동년의 맥을 이어 사회사업으로 여생을 보낸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녀는 동명목재 사장 강석진 등과 더불어 부산에서 BBS운동을 가장 먼저 일으켜 청소년 선도운동에 앞장선 장본인이기도 하다. 이연숙은 여자로서는 드물게 부산시 자문위원까지 지냈으며 그 밖에도 각종 불우시설 지원에 애쓰며 만년을 보냈다.

 

1940년대 사무실을 온천동으로 옮긴다. 1945년 해방을 맞은 동래권번은 또 다른 고객인 미군들과 함께 어울리며 서양 사교춤과 팝송과 재즈, 그리고 대중가요의 물결 속에 휩싸인다. 1961년 군사쿠데타와 함께 권번은 활동의 제재를 받으며 쇠락의 길로 접어든다. 1962년에 "동래국악원"으로 명칭을 개칭했다. 1968년에 온천동 210번지, 부산시 소유 낡은 일본식 목조건물을 불하받아 사무실을 이전하고 "동래국악진흥회"라는 법인체로 변신한다. 현재는 "동래국악원"이라는 이름으로 존속하고 있다. 일제는 태평양전쟁 때 동래권번의 와해를 꾀하면서 아편을 뿌리기도 했다. 부산지역에는 1915년 봉래권번, 1940년 부산권번이 생겼지만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없어졌다. 어려운 세월속에서나마 동래권번은 동래국악원, 동래국악진흥회라는 이름으로 계속 명맥을 이었다. 일제 강점기라는 특수한 시대적인 상황에 부딪쳐 우리의 예술이 끊어질 위기에 처하기도 했지만 권번이라는 특수한 곳에서 예술은 어렵게 그 맥을 이어갔다. 그 당시 부산의 예술도 마찬가지로 권번 기생들의 학습에 의하여 명맥을 이었다.

 

'한국춤의 한 경지와 맥'이 동래권번에 있었던 것이다. 동래의 기생들은 인고의 세월 속에서 학춤, 살풀이, 고무 등의 값진 무형문화재를 지켜왔다. 당시 일본인 상법회의소의 회두인 하자마가 일본정부의 밀명을 받고 만금의 가격을 지불하여 영도 바닷가의 땅을 사전에 모두 매수해버려 러시아가 영도에 저탄고를 마련하려는 계획을 저지했다. 러시아 저탄고를 막은 하자마는 부산최고의 갑부로 땅부자였다. 그 부산의 일본인 갑부들이 1883년 온천장 지역을 개발하였다. 여기에 1909년 부산~동래 간 경편철도와 1915년 전철이 운행되면서 온천장과 부산우체국 사이는 30분 거리가 되었고, 이에 따라 돈 많은 일본인들은 온천장에다 별장을 지었다.

 

당시 별장이 있었던 사람들은 오이케, 하자마, 토요다, 다카세 등이었고 이중에 가장 유명한 것이 하자마의 ‘동래별장’이었다. 일본인 거부 하자마의 별장은 부산진 수정산과 동래에 있었는데, 수정산 별장은 ‘하자마성’으로 불릴 만큼 웅장하였고, ‘동래별장’은 일본 천황족이 머무를 만큼 유명했다. 옛날에는 유명한 기생이 공연하는 특급 요정으로 부산의 정계, 재계 거물급 인사들이 드나들던 특별한 시설이었지만 지금은 회갑연, 돌잔치, 가족 모임 등 연회를 주로 하는 행사장으로 변하였다. 해방 후 하자마 별장은 한때 부산에 진주한 경상남도 제3지구 미군정청 사무실로 사용되었으며, 한국전쟁으로 수도가 부산으로 옮겨졌을 때는 이시영 부통령의 관저로 사용되었다가 오늘의 "동래별장"으로 변했다. 온천장에서 당시 원형을 보존하고 있는 대표적인 건물이다.(『부산지역총람』, 제2권 동래구, 동래기생조합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