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문화와 예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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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중가요의 산실, 부산항
  • 대중가요의 산실, 부산항

    부산항은 대중가요의 산실이다. 조용필의 ‘돌아와요 부산항’에, 문성재의 ‘부산갈매기’의 노랫말처럼 지금도 부산항에는 갈매기의 울음소리와 뱃고동소리가 귓전을 덮는다



    시대 : 현대

    주소 : 부산광역시 중앙동 4가

 

부산항에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수많은 사연이 있다. 대중가요가 남긴 부산항의 희, 로, 애, 락이다. 그중에서 최초의 부산항 엘레지를 꼽으라면 1939년에 남인수가 부른 조명암 작사,박시춘 작곡의 ‘울며 헤진 부산항’을 들 수 있다. 일제강점기에 관부연락선에 실려 징용을 떠나는 식민지 국민의 슬픈 가락이 가사마다 넘쳐난다. “울며 헤진 부산항을 돌아다보는/ 연락선 난간머리 흘러온 달빛/ 이별만은 어렵더라, 이별만은 슬프더라.” 그러나 광복과 함께 찾아온 ‘부산항’의 테마는 이별이 아닌 재회였다. 1946년에 나온 이인권의 ‘귀국선’은 징용에서 돌아온 동포들의 재회와 환희를 역사처럼 오선지에 담았다.  “돌아오네 돌아오네/ 고향산천 찾아서/ 얼마나 외쳤던가 무궁화꽃을/ 얼마나 외쳤던가 태극 깃발을/ 갈매기야 웃어라 파도야 춤춰라/ 귀국선 뱃머리에 희망도 크다.”


  50~60년대 대중가요는 수출시대의 막을 연 당시 부산항의 풍경을 그려낸다. ‘마음의 부산항’, ‘부산은 항구다’, ‘부산항 엘레지’ 등, 당시 대중가요의 아이콘은 하얀 제복에 담배 파이프를 입에 문 마도로스였고, 사랑을 주제로 한 엘레지의 1번지가 된 곳이 바로 부산항 제1, 제2, 제3부두였다. 그 대표적인 가수가 백야성이다. ‘마도로스 가수’로 불리어지던 그는 ‘잘 있거라 부산항’을 불러 월남의 전장으로 떠나는 파월장병들에게 남다른 의미를 안겨 주었다.
 그래서일까, 떠나는 군함에서 목청 터지도록 불렀던 것이 군가가 아니라, 백야성의 ‘잘 있거라 부산항’이 아니었던가. 삶과 죽음이 엇갈리는 전장으로 떠나는 장병들에게 소명의식을 심어주고 조국이 뭔지를 알렸다.


 그러다가 1975년에 조용필의 ‘돌아와요 부산항에’가 등장했다. 이 노래는 원래 ‘돌아와요 충무항에’로 작사, 작곡 되었다가, 영도 출신의 작곡가 황선우에 의해 개작되었다 한다. 그러다가 재일교포의 고향 방문이 러시를 이루던 1975년에 이르러서 공전의 히트를 치게 된다. ‘돌아와요 부산항에’란 노랫말 속에 부산항이 갖는 희로애락의 복잡한 의미망이 대중의 심중을 더욱 파고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애초의 제목이라는 ‘돌아와요 충무항에’나 ‘돌아와요 해운대에’를 넣어 불러보면 아무래도 가사도 촌스럽고 조용필의 용솟음치는 음색이 전혀 나지 않는다.  “꽃피는 동백섬에 봄이 왔건만/ 형제 떠난 부산항에 갈매기만 슬피 우네/ 오륙도 돌아가는 연락선 마다/ 목메어 불러봐도 대답 없는 내 형제여/ 돌아와요 부산항에 그리운 내 형제여” “가고파 목이 메어 부르던 이 거리는/ 그리워서 헤매이던 긴긴날의 꿈이었지/ 언제나 말이 없는 저 물결들도/ 부딪쳐 슬퍼하며 가는 길을 막았었지/ 돌아왔다 부산항에 그리운 내 형제여”  ‘돌아와요 부산항에’가 대중의 노래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슬픈 항구 때문이다. 전쟁이 막 끝난 1950년대 부산항은 원조물자가 들어오는 전초 기지였다. 정부가 주도한 이민자들과 파월 장병, 원양어선을 탄 뱃사람들이 이역만리로 떠나기 위해 가족과 이별하는 곳이다. 그래서 부산항은 슬픈 이별이 있는 항구고, 질곡의 역사를 안고 있는 항구다. 그 노래를 우리가 지금 부르고 있는 것이다. 작곡자는 "모국을 찾는 재일교포들을 위해 만들었다"고 밝힌 바 있지만, 부산항이 없었다면 이 노래도 없었다.  당시 재일동포들은 일제시기 징용으로 끌려갔다가 해방 후에도 귀국 기회를 놓쳐 대부분 일본에 정착한 사람들이었다. 해방 이후, 민단과 조총련이 대립하던 40년 가까이 고향방문을 자유롭게 하지 못한 분들이다. 1974년 문세광의 피격에 의한 육영수 여사의 서거와 1975년 베트남 패망이라는 냉전 분위기속에서, 1975년 9월 13일부터 2주일간 이루어진 재일동포모국방문사업은 조총련계 재일동포에 대한 폐쇄정책을 탈피하는 계기가 되었을 뿐 아니라 우리의 경제성장을 대내외에 알리는 큰 역할을 하게 된다.  당시 킹레코드사의 사장, 박성배는 조용필에게 이 곡을 다시 리메이크하자고 제안하였다 한다. 원래 이 곡은 1970년, 김해일이 "돌아와요 충무항에"란 제목으로 불렀는데 발표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대연각호텔 화재사건'으로 사망하는 일이 발생하자, 그에게 제안한 것이었다. 그러나 조용필의 리메이크 곡은 관심을 받지 못했다.  다시 2차 리메이크에 들어간 때가 1976년이다. 이별한 연인을 그리워하는 원곡의 내용을 바꾸어 떠나간 형제를 그리워하는 내용으로 가사를 바꾼다. 그들의 전략은 맞아 떨어졌다. 의도한 대로 부산에 입항한 재일 교포들은 ‘돌아와요 부산항에’ 노래를 들으며 눈시울을 적셨다. 부산의 유흥가에서 인기를 얻는가 했더니 서울로 몰아쳤다. 시대 상황과 맞물려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며 조용필의 운명도 바꾸어 버렸다. 밤무대에서 외국노래만 부르던 무명가수가 자고 일어나니 스타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돌아와요 부산항에’의 히트는 분명 전략적인 기획의도와 가수의 음악성이 큰 역할을 했음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부산항’이 없었다면 그 어떤 대중가요도 감동을 주진 못했을 것임에 틀림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