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역사와 문화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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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마민주항쟁의 성지, 부산민주공원
  • 부마민주항쟁의 성지, 부산민주공원

    부산민주공원은 부산 민주화운동을 대표하는 곳으로, 부산시민의 숭고한 민주 희생정신이 깃들어 있다



    시대 : 현대

    주소 : 부산광역시 중구 영주2동 민주공원길 19

 

1979년 10월 중순 저녁, 여러 무리의 대학생들은 부산광역시 중구 남포동․광복동․대청동 시내 중심가와 국제시장 등지에서 어깨동무를 하고 뛰어가면서 ‘유신철폐’․‘독재타도’ 등의 구호를 외친다. 길가에 있던 회사원과 상인 아저씨․아줌마를 비롯한 시민들도 시위대를 격려하며 몸조심하라 당부한다. 상인들이나 술을 마시던 손님들은 경찰의 진압으로 도망가던 대학생들을 너나할 것 없이 서로 숨겨주거나 같은 일행으로 위장해 주기도 한다. 박정희정권의 유신독재체제에 저항하며 부산에서 시작된 부마민주항쟁의 한 장면이다. 부마민주항쟁은 부산․마산지역 대학생과 시민들이 1979년 10월 16일부터 20일까지 박정희군사정권의 장기적인 유신독재체제에 저항하여 일어난 민주항쟁이다.

 1979년 박정희정권의 유신체제는 정치․사회적 갈등이 한계점에 도달하였다. 반정부 인사들에 대한 강제적 연행과 초법적인 체포․구금․고문․연금 등 강권정치가 빈번해지고 YH무역여공사건 등 노동탄압도 절정에 도달하였다. 특히 민주회복을 목표로 삼아 신민당총재에 당선된 김영삼의원에 대해 총재직 정지 가처분과 의원직 박탈사건도 변칙적으로 강행하면서 야당과 국민들의 불만은 한계점에 도달하게 되었다. 이에 김영삼의원의 정치적 텃밭인 부산에서 민주항쟁의 불꽃이 타오르게 되었다. 

1979년 10월 16일 오전, 부산대학교에서는 500명 정도의 학생들이 모여 유신정권 타도 등의 구호를 외친다. 선언문을 낭독한 뒤 「선구자」 등의 노래를 부르고 반정부시위를 벌였다. 부마민주항쟁의 서막이었다. 이어 학생들은 산발적으로 교문을 빠져나가 광복동․남포동 등 시내의 중심지까지 진출하여 가두시위를 전개하였으며, 시위대는 거의 5,000명으로 늘어났다. 이 때 시위대는 시내에 진출한 동아대학교 학생 1,000여명과 합류하여 가두시위를 계속하였다. 이튿날에도 더 많은 대학생들이 시위에 참여하였고 상당수의 시민들도 합세하였다. 18일에는 부산에서 시작된 시위가 지금의 창원시에 포함된 마산지역까지 확산되면서 부마민주항쟁으로 발전하였다. 이날 저녁, 창동 등 번화가에 집결한 경남대학교 1,000여 명의 학생들과 일부 시민들이 격렬한 시위를 벌였으며, 19일 저녁에는 대학생과 고등학생·근로자·시민 등으로 이루어진 약 8,000명의 시위대가 더욱 치열하게 시위를 계속하였다. 부산․마산지역에서 벌어진 시위에서는 파출소·경찰서·도청·방송국·세무서 등도 피해를 입었다.

 유신정권은 경찰력의 진압에 한계를 인식하고 18일 새벽 0시를 기해 부산 일원에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공수단병력을 투입하여 시위대를 강제 해산하였다. 20일 정오에는 마산·창원시 일대에 위수령을 발동하고 군대를 출동시켰다. 이 때 1,500명 이상을 연행하고 120여명을 군사재판에 회부하였다. 계엄령과 위수령의 발동으로 부마민주항쟁이 일단 진압되었다. 유신독재체제의 종말은 1주일도 되기 전에 찾아왔다. 10월 26일 저녁이다. 부마민주항쟁의 수습·대응책을 둘러싸고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서울 종로구 궁정동의 중앙정보부 안가에서 만찬 도중에 박정희대통령과 차지철 대통령경호실장을 살해하는 10·26사건이 일어났다. 몇 발의 총성으로 한계점에 도달한 유신체제의 군사독재정권이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부마민주항쟁은 유신정권의 종말을 가져오게 하였으며, 1979년 12월 12일 군사쿠테타로 정권을 장악한 신군부의 전두환정권에 저항하여 1980년 5월까지 민주항쟁으로 이어진 서울의 봄과 5·18민주항쟁에 크나큰 디딤돌이 되기도 하였다.

 2010년 7월에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가 부마민주행쟁 참여자들의 피해 조사와 명예회복 및 피해 구제조치를 국가에 권고하였으며, 2012년 4월에는 처음으로 부마항쟁 피해자들에 대한 국가 배상의 원고승소판결도 있었다. 민주공원에는 민주항쟁기념관과 함께 대형 상징물인 뜻기림횃불(민주의 횃불), 4.19 영령봉안소 및 위령탑도 조성되었다. 민주항쟁기념관의 맞은편에는 용두산공원에서 옮겨진 충혼탑이 자리 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