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 설화와 민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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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다시 바다를 건너간 동래할매
  • 다시 바다를 건너간 동래할매

    동래할매는 임진왜란 당시 왜적에게 잡혀간 포로로, 어머니를 구하기 위해 다시 바다를 건너가 노모를 구해온 부산 여성의 당찬 이야기다



    시대 : 조선

    주소 : 부산광역시 부산진구 범전동 381-11

 

동래할매는 동래노파, 동래구(東萊嫗)로 알려진 인물이다. 그녀에 대한 이야기는 임진왜란부터 시작된다. 그녀를 기록한 전(傳) 작품에 의하면, “왜구가 보물과 부녀를 크게 약탈해 간 일이 있었는데, 당시 30여세의 나이로 왜국에 잡혀가 10여 년을 지냈다” 고 하여, 자칫 그녀가 일상적인 시기에 왜구의 약탈로 잡혀간 것으로 오해할 수도 있다. 하지만, 사실 그녀는 동래성 함락과 함께 포로로 잡혀간 것이다. 동래부사의 순절을 기리는 지금의 송공단에 남아 있는 의녀위(義女位), 동시원난부녀위(同時苑亂婦女位), 송상현의 애첩인 금섬순난비(金蟾殉亂碑), 정발의 첩 애향, 이촌녀(二村女) 등의 비문이 남아 있어 동래성이 함락할 당시, 순절한 인물들에 대한 정황은 어느 정도 파악이 가능하다.  부사 송상현에겐 두 명의 소실이 있었다. 그 중에서 한금섬은 본래 함흥의 기생으로, 13세에 송상현을 따라 동래로 왔다가 성이 함락되고 송상현이 순절하자 3일간 항거한 끝에 순절했다고 전하지만, 이양녀(李良女)로도 알려진 이소사는 왜적에게 포로로 잡혀 일본으로 끌려간다. 동래할매와 처지가 다르지 않았다. 이소사는 일본에서 풍신수길에게 수청 들기를 강요받고 죽기를 각오하고 항거한다. 결국 적장도 그녀의 절의에 탄복하여 풀어주었단다. 귀국 후, 그녀는 송상현을 위하여 3년 복상을 하였다고 전한다. 송씨 문중에서는 충북 청주시 흥덕구 수의동에 두 여인의 정려문을 갖춰져 송상현과 함께 모신다.  일본 기록인 《서정일기西征日記》에 의하면, 당시 동래성 전투로 참수 3000명, 포로 500명이란 기록이 있다. 동래할매나 이소사는 이 비극의 주인공에 속하는 셈이다.

  동래할매가 일본으로 잡혀갔다가 동래로 되돌아오게 된 때는 1601년(선조39) 봄이다. 이미 화친을 했기 때문에 지난날에 잡혀간 사람들이 우리 사행(使行) 편에 돌아오게 된 것이다. 그때 다 돌아오진 못했을 것이다. 그냥 일본에 눌러 살 수밖에 없는 경우도 많았다. 노파는 운좋게도 돌아온 경우다. 당시 실제 포로로 잡혀간 사람이 얼마인지 정확히는 알 수 없으나, 포로로 끌려갔다 돌아온 전이생이란 인물에 의하면, 융마(蕯摩)지역의 조선인이 3만7백 명이라고 하였다.(『광해군일기』9년 4월 계축,「경상도 사복 정신도의 상소 중에서」) 당시 조선포로들은 한 곳에만 정착해 있었던 것은 아니고 조선 출병에 참여했던 각 지역 번주의 영지 내에 있었기 때문에 사실상 일본 전역에 걸쳐 퍼져 있었던 점을 고려하면 포로의 수는 최소한 10만 명은 되었을 것으로 학자들은 추측한다. 그 중에서 고작 7500명 정도가 귀국할 수 있었다. 귀국한 사람 중에는 강항, 정경득, 정희득, 정호인 등 관인의 위치에 있거나 몇몇 선택된 인물이다. 사창(私娼) 신분인 동래할매가 이 때 귀국한 점은 믿기지 않는다. 그래서 한갓 소설적 허구로 폄하하는 경우도 있다. 《간양록》의 저자로 알려진 강항이 4년간의 포로생활을 마치고 귀국한 시기가 1601년 4월이고 대마도를 떠나 5월에 부산에 도착하였으니 그녀도 이때 함께 돌아온 게 분명하다. 강항의 기록에 의하면, 좌수영 우후였던 이엽(李曄)이 적지에서 처형된다. 강항은 그 소식을 듣자, 당시의 심회를 시로 지은 것이 “선영 뒷산에 잡초는 누가 뜯을꼬?” 하는 한 맺힌 절규다. 국민가수 조용필이 ‘간양록’에서 토해내는 바로 그 노래다. 당시는 일본 정부로부터 허가받은 거상들의 무역선 ‘슈인센(朱印船)’이 베트남, 캄보디아, 필리핀 등 동남아시아 각지에서 활발한 무역활동을 폈던 때다. 포로로 잡혀간 무수한 양민들이 이때 일본상인들의 이익을 위해 고용되거나 포르투칼 노예상인들에게 팔려 넘겨졌다. 우리나라 고소설 《최척전》의 여주인공 ‘옥영’이 바로 그런 인물이다. 그녀는 일본으로 잡혀갔다가 남장(男裝)을 하고 장사치로 동남아를 떠돌다가 베트남 하노이에서 남편과 상봉한다. 잠시 중국 항저우에서 살다가 고향 남원으로 귀국한다. 반평생을 이국에서 지내야 했던 것이다.

  진주출신 조완벽 이야기도 있다. 그도 임진왜란 말기에 일본으로 잡혀갔다가 일본 해외무역상의 서기로 발탁돼 1604년부터 베트남을 3차례나 다녀왔다. 그 공로로 그는 1607년 회답사 여우길의 사행길에 송환됐다. 당시 일본에서 송환된 많은 사람 중에서 조완벽은 ‘베트남 행’이란 특이한 체험으로 화제가 됐다. 조완벽이 탑승한 무역선은 일본 경도의 거상인 스미노구라(角倉)집안의 것으로 알려져 있고 그들은 주로 베트남 북부 땅인 안남과 거래했다. 최근에는 일제침략으로 정신대에 끌려가 동남아시아를 떠돌다 지금은 돌아가신 ‘훈할머니’ 이야기도 전하고 있다.  그들은 포르투칼인과 총, 비단 등을 교역하기 위해서 무수한 조선인을 학살했다. 당시의 비참함을 종군 승려로서 참전한 경념(慶念)이 부산에서 목격한 기록이 있다. “일본으로부터 수많은 상인이 왔다. 그 중에는 인신 매매자들도 섞여 있었다. 이들은 남녀 늙은이를 사서 새끼줄로 목을 얽어 뒤에서 재촉했다. 말을 듣지 않을 때 채찍으로 매질하는 상황은 마치 죄인을 다루는 것과 같았다.… 이와 같이 사 몰아가지고 마치 원숭이 떼를 엮어서 걷게 하는 것과 같았고, 소나 말을 다루듯 하는 광경은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었다.(慶念,《朝鮮日日記》, 1597년(慶長2) 11월19일; 이채연, 『임진왜란포로실기연구』, 박이정, 재인용) 동래노파는 그 중 하나다. 그 전문을 기록한다.

  동래 노파는 본래 동래의 사창이었다. 1592년에 왜구가 보물과 부녀를 크게 약탈해 간 일이 있었는데, 노파는 당시 30여 세의 나이로 왜국에 잡혀가 10여 년을 지냈다. 그 후 1601년 봄에 우리나라 사행(使行)이 돌아오는데 왜구는 이미 화친을 했기 때문에 그 편에 지난날에 잡아간 사람들을 돌려보내게 되어, 노파 또한 돌아오게 되었다. 노파에게 늙은 어머니가 있었는데, 난리에 서로 간 곳을 몰랐다. 돌아와서 그 어머니의 소재를 물으니 모두 말했다.

  “난리에 또한 잡혀가서 돌아오지 않았다.”

  원래 모녀가 같이 왜국에 있으면서도 10년 동안을 서로 알지 못하였던 것이다. 노파는 그 길로 친족들과 작별하였다.

  “맹세코 어머니를 보지 못하면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다시 바다를 건너 왜국에 이르렀다. 거리에서 걸식을 하며 찾았다. 온갖 고생을 다하며 전국을 누볐다. 천만다행으로 어머니를 찾았다. 딸은 다 늙었는데 어머니는 칠십이 훌쩍 넘은 나이에도 아직 정정하였다. 놀란 왜인들 중에는 눈물까지 흘리는 이도 있었다. 이 말이 전해져서 온 나라에 알려지자 왜장은 둘을 송환하도록 해 주었다. 노파는 어머니를 모시고 고향에 돌아왔다. 재산도 직업도 없어서 살아갈 길이 없었다. 노파는 곧 언니와 더불어 어머니를 업고 함안 방목리에 가서 살았다. 그 어머니가 천년으로 작고하니, 자매가 서로 의지하고 살았다. 날마다 품팔이를 해서 생활을 하였는데, 옷 한 가지, 음식 한 가지가 생기면 언니에게 먼저 주고 자신은 뒤에 가졌다. 노파는 80여 세에 죽었다. 동리 사람들이 모두 동래노파라고 불러서 그대로 호가 되었다 한다. 아! 여자로서 능히 바다를 건너고, 또 만리타국의 험난한 바닷길에서 모녀가 서로 만날 수 있었던 것은 하늘이 돌본 것이다. 자고로 남자도 하지 못할 일을 능히 해서 세상에 뛰어난 절행을 세우고 오랑캐로 하여금 감화하게 하였다. 정말 어질다. 이렇게 그녀의 어진 삶을 존경하는 것으로 작자는 끝을 맺는다.

  임진왜란에 볼모로 잡혀갔다가 타지에서 죽은 경우도 있을 것이고, 돌아오지 못해 그곳에서 그대로 눌러앉은 경우도 있을 것이나, 동래할매처럼 천행으로 귀국하였다가 노모를 찾기 위해 다시 일본으로 건너간 경우는 없을 것이다. 작자 허목이 《기언(記言)》에 실은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