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 설화와 민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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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래온천의 백학전설
  • 동래온천의 백학전설

    동래온천에는 다리를 절던 노파가 백학의 다리가 완쾌되는 것을 보고 따뜻한 샘물이 솟고 있는 온천을 발견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시대 : 삼국시대

    주소 : 부산광역시 동래구 온천동 137

 

삼국시대부터 있었던 우리나라 제일의 온천이다. 55~56℃의 온도에 알카리성 식염천으로, 바닷물과 비슷하나 맑고 깨끗하여 예로부터 병 치료에 널리 이용되어 왔다.  동래온천을 발견하게 된 경위에는 아래와 같은 전설이 전한다. 신라 때, 동래 고을에는 다리를 쓰지 못하는 절름발이 할머니가 살고 있었다. 어느 날 할머니네 집 근처에 있는 논에는 흰 학 한 마리가 날아와 절룩거리는 다리를 끌면서 돌아 다녔다. 그러더니 갑자기 한 곳에 머물러 꿈적도 않았다. 사흘째 되는 날이다. 드디어 다리도 절지 않고 기운차게 날아가 버렸다. 이것을 본 할머니는 이상하게 생각하여 학이 서있던 곳을 찾아가보았다. 그랬더니 그곳에는 더운 물이 샘솟고 있었다. 할머니도 저는 다리를 더운 물에 담가 보았다. 사흘이 지났을까, 깨끗이 완치되었다. 이것이 다리를 고쳐주는 약천이구나, 생각한 할머니는 마을사람들에게도 권했다. 과연 효험이 있어 며칠 후에는 마을사람의 발도 나았다. 마을사람들은 이 샘을 온천이라 불렀다. 소문이 널리 퍼졌다. 이후부터 사람들은 치료를 위해 이 온천을 찾기 시작하였다. 온천이 보다 널리 이용되기 시작한 것은 약200년 전부터라 한다. 그러니 동래온천이 치료용으로 알려지게 된 경위는 이보다 훨씬 앞서는 것 같다.

  온천의 역사와 관련하여 북한에서 펴낸 《조선자연치료자원총서》에서는 ‘먼 옛날 여러 가지 상처와 아플 때 약수를 마시든가 온천에서 목욕을 한 것이 광천 치료의 시초가 되었다’ 한다. ‘양산 아래 나정 곁에서 얻은 알에서 키운 어린애를 동천에서 목욕시키니 부리가 빠지고 어여뻐졌다.’고 하는 기록이 가장 오랜 것으로 보고 있다. 286년(고구려 서천왕17)에는 ‘충원공이 동래온천을 이용하였는데, 온천 부근에는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었다’는 기록이 전한다.  고려시대 문장가 이규보는 ‘박공과 함께 동래 욕탕지로 향하면서 즉석에서 짓다'는 시에서, 목욕탕이 아니라 온천수가 콸콸 솟는 샘 아래에 못이 있어 그곳에서 목욕을 했고, 물이 뜨거워 계란을 익히고 차까지 달여 먹었다는 동래 온천장의 모습을 그려냈다.  조선시대 문장가 이수광은 《지봉유설》에서 우리나라 전역에 온천이 있지만 그 중에서 동래온천이 으뜸이라 하여 병자들이 목욕을 하면 곧바로 나았다고 전한다.

  온천을 의료와 치유의 영역으로 접근한 이가 조선시대 세종과 세조일 것이다. 그들은 의학서를 편찬하고 <온천병인구료의 규정>을 제정할 정도로 온천의 위상을 높였다. 세종시기에는 ‘온천근처에 거주하는 한가한 평민과 중들을 관리인으로 하여 온천 수리, 환자 구제 및 치료를 맡아 보게 하며, 환자가 모이는 수에 따라 식량을 팔아 밑천을 삼고 관리 일꾼들이 이것을 장악하게 하며, 밑천을 보존하고 이득금을 취하여 먹을 것이 없는 환자들에게 음식을 공급하며, 환자가 와 있는 동안 건물 보수 및 각종 기구, 식기류들은 국가 재산으로 공급배치하고 환자의 구호치료는 수시로 검열통제하게 하며, 밑천으로 보존하는 식량은 쌀과 콩, 팥으로 200석 이내로 한다’ 는 구체적인 내용이 제정될 정도였다. 그래서인가, 1460년(세조5)에는 정순공주를 비롯한 왕족이 직접 동래온천을 이용하였다는 기록도 있으며, 욕객들을 위해 온정원을 설치하고 온정직을 두었으며 역마까지 둘 정도로 직접 온정을 관리하였다. 동래온천을 이용한 가장 자세한 기록은 조선시대 문인 정구(鄭逑)가 1619년(광해군11) 자신의 체험을 일기형식으로 기록한 《봉산욕행록(蓬山浴行錄)》이 있다. 당시 욕탕에는 목탕(木湯)과 석탕(石湯)이 있었으며, 욕탕에 총 41번 들어갔는데, 처음 한번은 밖에서 물 끼얹기만 하였고 이어 목탕에서 3번, 바깥에 있는 석정(石井)에서 16번, 안에 있는 석정에서 21번을 목욕하였다고 할 정도로 지속적으로 탕에 들락날락 하였다. 그가 평소 풍질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당시 사람들은 온천탕에 들락날락 하는 반복법을 이용하였음도 알 수 있다.

  17세기 온탕은 강필리의 업적을 영원히 기리기 위해 세운 온정개건비(溫井改建碑,부산시기념물 제14호)에도 나오듯이 ‘돌로 두 개의 탕을 만들고 지붕을 덮은’ 형태였으며, 이후 건물이 낡아 탕이 막히자 “모두 9칸에 남탕과 여탕을 구분하였고 화려하기가 마치 꿩이 날듯이 으리으리하였다. 지키는 집을 짓고 대문을 세우고 안에는 비를 세웠다.” 그야말로 용신을 모시는 사당인 용각 옆에 둘 정도로 받들었던 곳이다. 일제침탈기 이후 40년 동안에는 온천과 약수들이 침략자와 그 앞잡이들의 유흥장소로 전락되기도 하여 지난 시절의 발전은 가져올 수 없었지만, 동래온천은 이제 그때와는 전혀 다르다. 부산도시철도 1호선을 타고 온천장역에서 내려 길을 건너 5분쯤 걸어가면 온천  거리가 나온다. 농심관광호텔을 둘러싸고 허심청을 비롯하여 오랜 전통을 가진 녹천탕 제일탕 금천탕 현대탕 등 대중 온천 목욕시설과 호텔 여관들이 집중되어 있다. 동시에 3,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대규모 온천시설도 있다. 이곳이 부산의 가장 대표적인 온천인 동래온천장이다. 주위에는 금강공원, 식물원과 각종 위락시설이 밀집되어 이곳에서는 여행의 피로마저 잊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