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 설화와 민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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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마하사의 나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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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하사는 천오백년 전통 사찰로, 금학이 알을 품는 형세를 지녀 창건된 이래, 16나한의 신통한 일이 전해오고 있다



    시대 : 삼국시대

    주소 : 부산광역시 연제구 연산6동 2039

 

마하사는 부산시 연제구 연산6동에 자리 잡은 천오백년 전통의 사찰이다. 해발 400m에 자리 잡고 있는 이곳은 황령산 산봉 중 하나인 금련산 자락이다. 금빛 연꽃산이니 연꽃 중에서도 가장 값진 연꽃이며 변치 않는 영구성을 상징한다. 더구나 이 마하사의 지형은 금학이 알을 품는 금학포란(金鶴抱卵)의 형세라니 중생을 따뜻하게 품어 부처로 키워낼 염원한 요람이 될 땅으로 여겨진다. 마하사에서는 1965부터 1970년 대대적인 중창불사를 단행하던 중 대웅전에서 아도화상이 창건했다는 상량문이 발견되었다. 아도화상에 대해서는 《삼국유사》 권3 아도기라(阿道基羅)에 기록되어 있으나 정확하게는 알 수 없고, 다만 도리사, 직지사, 갑사, 전등사와 더불어 마하사를 아도스님이 창건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마하사가 아도화상의 창건이라면 마하사가 처음 창건된 연대는 5세기경으로 올라가는 고찰이 된다. 지금으로서는 이를 증명할 순 없으나 마하사가 그만큼 오래된 고찰임을 암시하는 것이다. 《동래부읍지》에는 “황령산은 화지산으로 뻗어나 있으며 마하사가 있다”고 하였다. 1425년 이전에는 봉수대가 있었다. 이때 봉수대 밑 금련산에 있던 마하사는 정찰임무를 맡은 호국사찰로서 그 역할을 하였으며, 특히 대나무가 많아 전시에는 화살을 공급하기도 했다고 전한다. 임란 때 마하사가 전소된 까닭이 이러한 역할 때문이 아닌가 한다.

  금련산 마하사는 북으로 연제구, 서로 부산진구, 동으로 수영구, 남으로 황령산과 접해 있고, 금련산 자락 끝에 있는 배산(盃山)을 마주한다. 산이 연꽃 모양을 해서 부처님 앞에 공양을 올릴 때의 황금색 금련화로 말미암아 금련산이 되었다는 설이 있다. 수영8경의 하나인 연산모종(蓮山暮鐘)이 바로 금련산 마하사에서 들려오는 저녁 종소리를 말하는 것이다. 본사인 범어사와 운수사, 선암사와 함께 부산의 4대 고찰에 속한다. 1717년(숙종43)에 초암 형태의 대웅전과 나한전(응진전)이 건립되자, 박성우(朴星祐) 불자가 자원 발심하여 16나한상을 조성했단다. 마하사에는 많은 나한설화가 전하는 데, 그 중에서 ‘불씨를 구해 준 나한과 동지 팥죽 이야기’는 마하사의 신통력을 보여준다. 지금으로부터 500여 년 전 어느 동짓날의 일이다. 스님이 새벽에 일어나 보니 늘 살려두는 화덕에 불씨가 꺼져 있었다. 스님은 황령산 봉수대로 올라가서 불씨를 구했다. 그러자 봉수꾼이 말했다.

  ″조금 전에 동자승이 와서 불씨도 주고 팥죽도 먹여서 보냈잖소.″

  ″우리 절에는 동자승이 없소.″

  말이 끝나자마자 봉수꾼은 틀림없이 마하사에서 왔다며 내려가 보라고 했다. 급히 내려와서 화덕을 살펴봤다. 불씨가 살아 있었다. 이상해서 나한전에 들어가 보니, 오른쪽 3번째 나한의 입술에 팥죽이 묻어 있었다. 스님은 자신의 나태함이 부끄럽기도 하였고 나한이 신통하기도 하였다. 스님은 자신도 모르게 감읍하였다. 

  ″참새를 쫓아낸 나한 이야기″도 있다. 해마다 참새 떼가 모여들어 청정한 도량을 시끄럽게 어지럽히고 곡물까지 피해를 주니 골치가 썩었다. 그래서 나한전에 가서 빌었다. 어느 날 도량 가운데 참새 한 마리가 떨어져 죽어 있었다. 그 뒤론 참새 떼가 사라졌다. 지금도 마하사에는 참새 떼가 근접하지 않는다고 전한다. 그 때문은 아니겠지만 지금도 마하사 골짜기에는 수십의 마리 까마귀가 떼를 지어 모여들지만 경내에 범접하지 않는 것이 이상하다.

  ″소리 나지 않은 금구(金口) 이야기″는 이렇다. 마하사의 금구가 아무리 쳐도 소리가 나지 않은 때가 두 번 있었다. 1860년대와 1910년대다. 1860년대에 해령스님이 개금(改金) 번와(燔瓦) 불사를 마치고 회향 시에 금구를 치니 4주야로 소리가 나지 않았고, 1910년대에 해봉스님이 개금과 탱화불사를 마치고 회향 시에 금구를 쳤지만 소리가 나지 않았다. 이 두 번의 이상한 일이 모두 16나한의 신통이었다. 자금이 부족해서 불사를 뒤로 미루었던 까닭에 나한들이 신통력을 발휘하여 나한전 불사를 촉구하였던 것이었다. 승도들은 목욕재계하고 16나한전의 불사를 약속하였다. 그러자 금구가 다시 울렸다. 그 금구는 분실되어 지금은 행방을 찾을 수 없다.

  나한은 인간의 소원을 성취시켜 주는 복전(福田)이기에 신앙의 대상이 되었을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통일신라시대부터 시작되어 고려에서는 28회의 나한재를 베풀었고 조선 때는 태조 이성계가 석왕사에 나한전을 짓고 광적사의 오백 나한을 옮겨 5백 일 기도 끝에 조선개국을 이뤘다고 전한다. 마하사에는 지금도 유형문화재 제54호인 현왕도(現王圖), 문화재자료인 영상회상도(靈山會上圖, 제15, 제16호) 2폭, 16나한도(十六羅漢圖, 제17호), 석조석가여래삼존상(石造釋迦如來三尊像, 제18호)과 문화재자료 제19호인 목조석가여래좌상과 제20호인 석조나한상 등 귀중한 불교 문화재를 소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