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 인물과 자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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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독도는 우리 땅, 안용복
  • 독도는 우리 땅, 안용복

    안용복은 동래부의 좌수영 소속 민간 외교가로, 조선 숙종 때 일본 막부에게 찾아가 직접 담판을 지어 울릉도․독도를 지켜내는 데 결정적인 외교역할을 수행한다



    시대 : 조선

    주소 : 부산광역시 수영구 수영동 344-16

 

1693년(숙종19) 봄, 울릉도로 고기잡이를 갔던 우리 어부 두 사람이 지금의 일본 돗도리현(島取縣)인 호키주(伯耆州)의 어민들과 시비가 벌어졌다. 울릉도의 영유권 문제가 발단이 된 것이다. 호키주로 납치되어 갔다가 그 해 겨울에 쓰시마(對馬島)의 도주를 통해 보낸 일본 사신과 함께 돌아왔다. 당시 두 어부가 안용복(安龍福)과 박어둔(朴於屯)이다. 

 1696년(숙종22) 5월에도 울릉도에 고기잡이를 갔다가 10명의 동료와 함께 일본 어민들을 쫒아 호키주까지 갔다 왔다. 이렇게 두 차례에 걸쳐 울릉도․독도가 조선의 영토라는 사실을 인정받고 돌아왔으나, 우리 조정에서는 허락 없이 외교문제를 일으켰다는 이유로 압송하여 사형까지 논의하다가 귀양으로 마무리 지었다. 17세기 초부터 울릉도를 탐내고 있었던 일본과의 외교적 분쟁이 조정으로서는 더 큰 걱정이었던 것이다. 이듬 해 쓰시마 도주는 자신들이 울릉도․독도 문제를 야기한 잘못을 사과하고, 일본 막부가 울릉도를 조선의 영토로 인정한다는 공식문서를 조선 조정으로 보낸다. 이로써 조선정부는 영유권 분쟁에 휘말렸던 울릉도․독도를 공식적으로 해결하게 되었다. 그 역할을 주도적으로 해결한 인물이 안용복이지만 그의 죄는 풀리지 않았다. 

 안용복, 그의 이름은 안용복(安用卜)이라고도 쓴다. 효종 때 태어나 숙종 때에는 영토 수호에 있어 두드러진 활약을 보였다. 그는 동래지역 출신으로 동래부 좌수영의 수군에 소속된 능로군이었다. 신분이 평민이라고도 알려져 있고, 또는 천민출신의 사노비였다고도 한다. 부산 동구 좌천동에 거주하면서 초량왜관에서 일본어를 습득하였고, 어머니를 만나러 울산으로 갔다가 어민들과 함께 울릉도로 고기잡이를 나갔던 연유로 영토 분쟁에 휘말렸다. 애초 1693년(숙종19) 그가 일본에 인질로 납치되어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의 영토라고 인정한 외교 문서를 받았으나, 조선으로 돌아오는 과정에서는 울릉도에 대한 고기잡이 허가권을 지속적으로 유지하기 위해 조선과 일본의 외교적 문제를 획책하던 쓰시마 도주의 농간으로 그 문서를 탈취 당하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3년 뒤에 일본으로 갔을 때에는 ‘울릉도와 독도(자산도)의 감세(鬱陵子山兩島監稅)’라 하여 자신의 항의가 개인이 아니라 조선 관리의 입장에 있다는 의지를 나타내었다. 이 때 일본으로 가다가 풍랑으로 배가 표류하여 지금의 시마네현(島根縣) 오키섬(隱岐島) 도주를 만났다. 그 자리에서도 울릉도와 독도를 조선의 영토로 인정한 막부의 외교문서를 근거로 일본 어민의 울릉도 침범을 강력하게 항의하였다. 이 당시 오키섬의 관리들과 도주는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의 영토라는 안용복의 주장에 대해 이의 제기하지 않고 그대로 보고서로 작성되었다. 그 내용은 ″조선의 팔도에는 강원도가 있으며, 이 도 가운데는 죽도(울릉도)와 송도(독도)가 있다(朝鮮之八道……江原道, 此道中竹嶋松嶋有之)″라는 기록이다. 현재 독도를 자신의 영토로 주장하는 데 앞장 선 일본 시마네현 오키섬의 도주와 관리들은 이미 울릉도와 독도를 17세기 후반에 조선영토로 인정한 셈이다.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1954년, 안용복기념사업회의 전신인 대동문교회에서는 그를 '독전왕 안용복장군'으로 높여 부르면서 장군으로 호칭하였다. 본 사업회에서는 안용복이 근무하던 지금의 수영사적공원에 수강사(守彊祠)와 안용복장군 및 충혼탑을 건립하여 매년 4월 18일 제사를 지내고 있다. 2014년 3월 11일에는 안용복기념부산포개항문화관을 부산 동구 좌천동에 개관하여, 그의 독도 수호정신을 영원히 기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