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생활과 의식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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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산 멋쟁이 마술사, 부산의 양복점들
  • 부산 멋쟁이 마술사, 부산의 양복점들

    부산 멋쟁이들 - 6.25전쟁 이후 부산 광복동 옛 미화당 백화점 부근에서 개업하여 오늘날까지 영업을 하고 있는 양복점



    시대 : -

    주소 : 부산광역시 중구 동광동2가

 

우리나라에 양복(洋服)이 처음 들어온 것은 1894년 「갑오개혁」을 계기로 당시 조선정부가 서양 문명을 받아들여 제반제도 개혁을 단행 할 때 복제개혁으로 처음 입게 되었다. 1896년(고종 33) 4월 7일 칙령 제78호로 「육군복장규칙」을 제정하여 당시 사용하던 군복을 폐지하고 서양식 육군복장을 제정하였다. 1900년(광무 4) 4월 17일에는 칙령 제14호로 「문관복장규칙」을 정하였고, 제15호로 문관대례복제식(文官大禮服制式)을 정하여 조정 대신들의 관복을 서양식 관복으로 바꾸었다. 당시 정한 서양식 문관복은 일본을 통해서 들어온 것이며, 일본은 영국의 대례복을 모방한 것이었다. 개화기의 양복은 주로 관복으로 이용하였으며, 일부 상류층에서만 드물게 볼 수 있는 것이었다.

 

양복이 우리나라에 본격적으로 보급된 것은 일제강점기 이후부터이다. 당시에는 일본인이나 일부 부유층에서 입었을 정도이며, 일반 서민들에게는 그림의 떡이었다 할 수 있다. 1945년 8월 해방과 더불어 일본인들에게 재단 기술을 배운 기능사들에 의 양복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6.25전쟁 이후 부산의 중심지인 광복동, 남포동 일대에는 일본인들에게 기술을 배운 자인들이 하나 둘 양복점을 개업하였다. 1960~70년대 양복 재단사는 그야말로 선망의 직종이었다. 세계 기능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양복 재단사들은 카퍼레이드를 하며 시내를 누볐다. 그래서 당시 ‘양복점은 돈을 자루로 쓸어 담는다’는 말이 나돌 정도였다.

 

그러나 1980년대에 들어서자 기성복의 등장으로 양복업계는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는다. 기성복의 스피드와 저가 물량 공세에 점차 설 자리를 잃어갔던 것이다. 부산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러한 시대의 흐름에도 불구하고 50년여 년을 꾸준히 한 길만을 걸으며 고집스러운 행보를 오늘날까지 이어가는 양복점이 있다.

 

[백모양복점]

백모양복점은 1952년에 개업한 부산광역시 중구 동광동 2가에 있는 수제 맞춤 양복점이다. 함경도에서 양복점을 운영하던 김두헌(작고)이 6·25전쟁 때에 부산에 피난을 내려와, 1952년에 광복동의 미화당백화점(현 ABC 마트) 옆에서 최초로 문을 열었다. 백모양복점의 ‘백모(百毛)’는 100%의 순모를 뜻하는 것으로 양복 제작 기술이 약했던 시기에 고급 천과 고급 양복을 지향하는 양복점이란 의미를 지니고 있다. 옛 미화당백화점 주변은 부산의 최고 중심가로서 이곳에는 백모양복점을 비롯하여 많은 양복점이 있었다. 당시에 백모양복점의 영업은 활황을 누렸으며, 일하는 종업원이 18명이나 있었다.

현 백모양복점의 문종두 사장은 1960년대 초반부터 양복 만드는 일을 시작하였다. 과거 양복점에서는 풀무질을 하고 숯다리미를 사용하였으며, 손으로 천의 끝을 모두 감치는 등 고된 작업이 많았다. 3년 동안 견습생으로 일을 하면서 바지와 조끼를 만드는 법을 배우다가 5년이 지나면서 양복 상의를 제작할 수 있었다. 이때부터는 정식 기술자로 인정을 받으며, 상의를 한 벌 만들 때마다 일정한 돈을 받게 되었다. 재단사로 일을 배웠던 문 사장은 김두헌 사장으로부터 백모 양복점을 이어받아서 1979년 3월, 현 위치인 중구 동광동 2가로 이전하였다.

1990년대 들어 대기업이 기성복 사업을 시작하였고, 전국양복점협회에서 대기업의 진출에 큰 반대가 있었지만 결국 막지 못하였다. 이후로 기성복 시장이 확대되면서 맞춤 양복점을 찾는 손님이 크게 줄었다. 기성복의 유행은 한국인의 체형과도 관련이 있었다. 식생활 수준이 높아짐에 따라 한국인의 체격이 좋아졌으며, 이에 따라 기성복을 입어도 옷맵시를 낼 수 있었다. 기성복이 양복 시장을 잠식함에 따라 백모양복점을 비롯한 부산 동광동에 모여 있던 양복점들의 매출이 크게 줄어들었다. 2006년 3월에는 제37회 양복의 날 ‘금익장’을 수상하였다.

기성복의 여파로 매출이 감소하여 2012년 현재 백모 양복점에서 일하는 직원은 3명[1980년대 18명]에 불과하다. 그래도 전통 맞춤복을 고집하는 손님들은 꾸준히 백모 양복점을 찾고 있다. 수제 맞춤 양복은 가격이 비싸기 때문에 주 고객은 회사의 사장과 이사 등 부유하고 지위가 높은 사람들이다. 또한 결혼식을 맞이하여 예복을 맞추기 위하여 백모 양복점을 찾는 젊은이들도 있다.

 

[국정사]

국정사는 부산광역시 해운대구 중동에 있는 남성 양복점이다. 전신은 1946년에 동구 범일동에서 김필곤(사망, 1924년생, 부산양복협회 초대 회장)이 개업한 태양피복사로, 부산지역의 대표적인 양복점이다. 부산지역 유일의 명장 업체이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인이 설립한 미나카이[三中井] 백화점[중앙동의 구 부산시청 부지에 소재] 내에 ‘정자옥’이라는 양복점에서 근무하던 김필곤은 일본인에게 양복 기술을 전수받았다. 이후 1946년에 동구 범일동의 구 삼일극장 옆에서 태양피복사를 개업하여 철도청 등의 공무원들을 대상으로 영업을 하였다. 당시 범일동 지역은 조선방직을 중심으로 직물 산업이 활성화되었고, 이후 태양피복사를 중구 남포동으로 이전하면서 1948년에 ‘국정사’라는 이름으로 개업하였다. 국정사(國正社)라는 이름은 일제강점기 한국인의 고난을 생각하여 ‘나라가 바로서야 한다’는 의미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1961년 5·16 군사정변 직후에 중구 광복동 1가로 이전하였고, 1978년에 창업주의 동생인 김영곤(87세)이 2대 사장이 되었다. 1981년에 양창선 대표가 3대 사장이 되었고, 2005년 9월 21일에 양창선 대표는 대한민국 명장(양복 부문)에 선정(노동부)되었다.

현 대표인 양창선은 1967년 18세의 나이로 광복동 현대 복장사(대표 김영필, 폐업)에서 10여 년간 기술을 배우다가, 1970년경 코코양복점으로 옮겨서 일하였고, 국정사를 인수하여 운영해 오고 있다. 1969년부터 국제기능대회와 세계 장애인기능대회에서 금메달을 획득한 채성희 등과 함께 국정사를 운영해 왔으며, 양복의 기술 전수를 위하여 인재 발굴과 양성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국정사는 1940년대 부산 지역 양복점들 중, 유일하게 남아서 양복점의 맥을 이어가고 있다. 현재 남성 양복의 주문 제작은 대기업의 대량 생산에 밀려 어려운 경영 환경에 있으나 명인다운 투철한 장인 정신에 의해 ‘수제 양복의 손맛을 알고 세상에서 하나 뿐인 나만의 옷을 고집’하는 고정 고객들에 의해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현재는 부산광역시 해운대구 중동 파라다이스호텔 신관 지하 1층에 위치하고 있다.

2012년 5월 현재, 대표와 10명의 기능사들이 근무하고 있다. 남성복 정장 위주로 주문 제작하고 있으며, 양복 한 벌 당 가격은 대략 150만 원 내외이다. 고정 고객을 중심으로 예복 제작 등을 위하여 손님들이 찾고 있다. 국정사 패션 그룹으로 마이스터하우스(Meister Haus)라는 경영 회사를 설립하고, REX(1978년 설립, 드레스 셔츠 전문), 쥬스또우노(Giusto Uno, 2011년 설립, 기성복·맞춤복·턱시도 전문), 부산 상례복(1999년 설립, 상례복 대여·판매) 등을 사업 회사로 운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