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생활과 의식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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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산 새벽을 여는 재첩국
  • 부산 새벽을 여는 재첩국

    부산 새벽을 여는 재첩국은 부추를 썰어 넣은 시원한 국물 맛이 일품으로, 아지매의 구수한 목소리가 아침 활기를 돋운다



    시대 : 현대

    주소 : 부산광역시 모라동

 

″재칫국 사이소, 재칫국~!″ 부산아지매의 구수한 목소리가 이른 새벽 부산시민의 아침을 깨운다. 낙동강에서 채취한 재첩이 팔리던 풍경이다. 재첩국을 양동이에 이고 ‘재첩 사이소’를 외치던 아낙들은 엄궁, 하단에서 채취한 재첩을 다시 대티고개, 까치고개를 넘어서 시내로 판매하러 다녔다. 재첩이란 민물의 모래 속에 사는 가막조개다. 너무 작아서 살을 발라먹기도 어렵다보니 경상도방언으로 째마리라고 한 것이다. 그만큼 볼품없고 보잘 것 없는 조개란 뜻이었겠지만, 하룻밤 사이에 3대 손을 볼 수 있을 정도로 번식력이 왕성해 첩을 많이 거느린다는 속설도 있다. 지금의 하구언 부근인 낙동강에 옛날, 두 아내를 거느리고 사는 어부가 있었다. 조강지처와 첩 사이가 얼마나 정분이 좋았던지 둘은 친자매 이상으로 잘 지냈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어부는 강에서 고기를 잡다가 갑자기 쏟아진 빗물에 강물이 불어나 실종되고 말았다. 졸지에 과부가 된 두 여인은 소복을 하고 서로를 의지한 채 같이 한 방에서 살다가 3년 상을 마친다. 이후, 둘은 어부가 실종된 그 강가에서 함께 신발을 벗어 놓고 투신한다. 동네 사람들은 두 여인의 시신(屍身)을 찾으려고 강바닥을 뒤졌으나 시신은 온데간데없고 재첩(在妾)조개만 잡혔단다. 재첩이란 첩을 두었다는 말이다. 어부가 죽어서 자신을 뒤따라온 두 여인을 한 방에 거느리고 사는 재첩조개가 되었다는 전설이다. 재첩조갯살은 다른 조개와 달리 뫼산(山)자 모양으로 되어 있고, 같은 각질인 한 방에서 양편에 두 아내를 거느리고 산다 하여 재첩조개라 이름 했단다. 하지만 사상과 동래지방에서는 가막조개를 재첩조개라 한단다. 재첩은 고단백, 고미네랄 식품이다. 허준의 《동의보감》에는 "독이 없고, 눈을 밝게 하며 피로를 풀어주고, 특히 간 기능을 개선해 황달을 치유한다″ 했고, 또 ″소변을 맑게 하여 당을 조절하는 효능이 있으며, 몸의 열을 내리고 기를 북돋우는 효과가 있다"고도 하였다. 그래서 입추 전의 재첩은 간장약이라는 말까지 있다. 재첩국에는 대개 부추를 썰어 넣는데, 부추가 재첩에 부족한 비타민A를 보충해 균형을 이룬다고 하니 절묘한 궁합이 아닐 수 없다. 맑은 물에만 사는 재첩을 국으로 끓여먹을 때 국물도 좋지만 살도 함께 먹는 것이 건강에 좋다고 한다. 항암효과와 면역성 증강에 효과가 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언제부터 재첩국을 먹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재첩을 잡을 수 있는 기구가 발달된 고려시대 이후로 추정하고 있다. 수해가 잦은 낙동강 주위의 주민들이 구황식품으로써 애용 발달시킨 음식이었다가, 한국전쟁 당시 피난민이 상주하게 되자, 아침 일찍 일하러 나가는 사람들에게 속을 풀거나 따뜻하게 하는 해장국의 역할을 한 것으로 판단한다. 특히 궁핍한 시절, 재첩국 한 그릇을 사서 물을 붓고 밥을 말아 양을 늘리면 온 식구가 함께 먹을 수 있는 어려운 시절의 음식이었다. 그래서 부산의 상징적인 음식이었다. 재첩은 원래 낙동강 하류인 하단, 김해, 명지, 엄궁 등의 강가와 수영강 인근에서도 흔히 채취 할 수 있었지만 원산지는 부산 하단동 577번지란다. 최근에는 사상구에 삼락동 재첩거리가 형성되어 부산의 주요 먹거리로 등장하였다. 과거 낙동강 구포다리 아래에서 직접 채취한 재첩을 인근 초가집에서 끓여 팔던 데서 비롯된 것으로 지금은 삼락교차로 부근에 집중적으로 모여 있다.

 7,80년대 군락을 이뤄 자생하면서 낙동강의 보물이라고까지 불리던 낙동재첩은 하굿둑이 조성되면서 바닷물과 강물이 만나는 범위가 좁혀지면서 생산도 줄었지만 최근 낙동강 하구 곳곳에 재첩이 돌아와 자연산 채취가 다시 시작됐다. 이제 재첩을 채취하는 광경도 다시 볼 수 있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