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역사와 문화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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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려시대 축조된 방어진지, 기장읍성지
  • 고려시대 축조된 방어진지, 기장읍성지

    기장 고읍성에서 기장읍성으로의 이전 추이를 잘 알 수 있는 조선 초기의 읍성이다. 한편 동문 터와 남문 터 부근의 성벽에서 울산, 언양, 창녕 등의 지명이 확인되어 당시 기장읍성의 축성에 경상도 주민들이 동원되었던 사실을 알 수 있다.



    시대 : -

    주소 : 부산광역시 기장군 기장읍 서부리

 

기장읍성(機張邑城)은 부산광역시 기장군 기장읍 동부리, 서부리, 대라리를 포함한 옛 기장 시가지 일대에 위치한다. 기장읍 동부리, 서부리, 대라리 일대의 옛 기장 시가지 주변을 에워싸고 있는 조선시대 기장현의 읍성이 기장읍성이다.

 

기장읍 교리(校里)에 있던 고읍성(古邑城)이 왜구의 침입으로 함락되고 관아가 모두 불에 타버리자 왜구의 침략을 막기 위해 고려 우왕(隅王, 1374~1388)때 지금의 읍성이 있는 곳으로 치소(治所)를 옮겨 울산, 언양, 창녕 등지의 주민을 동원하여 쌓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1530)』과 각종 읍지(邑誌)에 “기장읍성은 석축으로 둘레가 3,197척이며, 성의 높이는 12척”으로 기록되어 있다.

 

기장읍성의 형태는 북쪽의 낮은 산과 남쪽의 평지에 걸쳐 축조된 평산성(平山城)이며, 축조 수법은 평지에는 성벽의 내․외측 모두를 돌로 쌓는 협축방식(夾築方式, 안팎으로 돌을 쌓는 축조법)이나 지형이 높은 곳은 성벽의 밖은 돌로 쌓고 내부는 흙으로 채우는 편축방식(片築方式, 외부는 돌로 쌓고, 내부는 흙으로 채우는 축조법)으로 축조한 것으로 생각된다. 4대문 중 동․서․남문에는 반원형의 옹성(擁城)이 있었으며, 동문지 부근에서 적대(敵臺, 성문을 공격하는 적을 방어하기 위해 성문 부근 성벽에서 성 밖으로 돌출하여 쌓은 시설)가 확인되었다.

 

현재 남아 있는 성벽은 기장읍성 동문 터[東門址] 주변 약 50m와 서부리 쪽 서쪽 성벽 100m 정도가 비교적 양호하게 잔존한다. 동문 터의 경우 반원형의 편문식 옹성(片門式甕城)이 문설주와 함께 잘 남아 있고, 성벽의 잔존 높이는 3~4m 정도이며 지대석에서 10~15㎝ 정도 들여서 207×74㎝, 119×50㎝ 크기의 비교적 큰 돌을 사용하여 성벽을 쌓았다. 서부리 쪽의 경우도 잔존 높이는 3m 정도, 상부 석축의 너비는 2.2m로 잘 남아 있다. 한편 남쪽 성벽도 높이 1.5m 정도 규모로 잔존하고 있으며, 기장군 기장읍 대라리 186번지 주변에도 지적도상으로 반원형의 옹성의 흔적이 보인다. 북문의 경우 기장군 기장읍 서부리 82번지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나 문지나 옹성의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각종 기록에 의하면, 기장읍성은 15세기 중반~16세기 전반 사이에 대규모 증축이 있었으며, 1592년 임진왜란 당시 왜군이 죽성리 왜성(竹城里倭城, 부산광역시지정 기념물 제48호)을 축조하면서 기장읍성의 성벽 돌을 반 이상 뽑아 갔다는 기록을 볼 때, 임진왜란 당시에 이미 성벽의 상당 부분이 훼손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 외 부속 시설로는 적대[敵臺, 문지 좌우에 있는 치(雉)]가 동문 터 남쪽에 남아 있다. 성벽은 지대석(地臺石)을 놓고 그 위에 하부는 대형석으로, 상부는 소형석으로 잔돌을 끼워 가며 쌓았는데, 간혹 하단부에 큰 돌을 길이로 세워서 쌓은 곳도 있다. 성벽의 축조 방법은 대부분 바깥쪽의 석축 벽만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안쪽은 흙으로 채우는 편축(片築) 방법이 주로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문지 주변이나 옹성 벽은 안쪽과 바깥쪽 모두 돌로 쌓는 협축(夾築) 방법을 병용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급속한 도시화로 인해 성벽이 훼손되어 없어지거나 주택 담장으로 사용되는 등 보존 상태가 좋지 않으나, 건물 하부에는 성벽의 기초가 잘 남아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성내에는 수령인 현령의 집무소인 동헌(東軒)을 비롯하여 향사당(鄕射堂), 객사(客舍), 차성관(車城館), 장관청 등 많은 건물들이 있었으나 동헌을 비롯한 관아 건물은 일제 강점기 때 지금의 기장초등학교를 지으면서 허물어 버렸다고 한다. 유일하게 장관청(將官廳, 부산광역시 문화재자료 제47호) 건물만이 원위치에 남아 있어 2014년 해체·수리를 통해 원 모습으로 복원하였다. 성벽 역시 일제강점기와 해방 이후 각종 도시개발로 인해 심하게 훼손되었으나 복원·정비를 위해 지속적으로 보호구역 내 토지를 매입하고 있다. 1996년 5월 25일 부산광역시 기념물 제40호로 지정되었다.

 

기장 고읍성에서 기장읍성으로의 이전 추이를 잘 알 수 있는 조선 초기의 읍성이다. 한편 동문 터와 남문 터 부근의 성벽에서 울산, 언양, 창녕 등의 지명이 확인되어 당시 기장읍성의 축성에 경상도 주민들이 동원되었던 사실을 알 수 있다.